구수~한 냄새와 뜨끈한 밥공기를
흔들어 스탠그릇에 뭉치고
국밥에 '풍덩' 빠뜨려 숟가락으로 휘휘 저어
한입 딱! 떠먹을 때의 그 시원함
하지만 생각해 보셨나요?
전국팔도 어디를 가도 식당에서 밥이 담겨 나오는 것은
은색 스탠그릇, 그것도 똑같은 사이즈의 공깃밥
이쯤 되면 공깃밥 스탠그릇 개발자는
정말 떼돈을 벌었을 거 같은데..
하지만!
여기에는 우리들이 몰랐던
숨겨진 진실이 있었습니다.
아래에서 상세하고도 간결하게 한번 풀어 보겠습니다

1. 공깃밥은 사실 한국 정서와 반대였다?
사진으로도 이미 증거가 충분해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지지만
사실, 옛날부터 한반도에서는 큼직한 대형 그릇에 밥을 수북이 쌓아 올린
일명, 고봉밥을 먹는 것이 전통이었습니다.
농업등으로 인한 열량 소모가 높았고, 어렵게 살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밥 외에는 딱히 열량을 얻을 수단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전쟁 이후 급속한 개발이 시작되며 가속화되는 인구수에 비례해
쌀이 매우 부족했기 때문에 박정희 정부 시기에 들어서
쌀 소비량 감소를 위해 '혼분식 잘려 운동'의 일환으로
규격이 정해진 공깃밥이 도입되었습니다.
2. 얼마나 디테일한 규격일까?
일반적으로 식당의 밥 한 공기는 210g입니다.
이 숫자는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1970년대 초반까지도 식당에서는
밥을 미리 퍼놓지 않고 주문이 들어올 때마다 주걱으로 밥을 퍼서
손님 상에 올렸습니다. 이 과정에서 2가지 문제점이 발생되었는데요
◎ 밥솥을 자주 여닫는 과정에서의 보온이나 오물 혼입 가능성
◎ 밥을 푸는 사람마다 기준이 달라, 양이 들쭉날쭉하여 정확한 원가 계산과 재고 관리 어려움
경제 개발시기 가파른 개발과 함께 임금 수준이 올라가면서 외식 수요도 함께 올라갔고
식당 경쟁에 의해 밥을 되려 과하게 퍼주거나 과소비+과다음식물쓰레기등의 부작용이 생겨나면서
쌀 부족과 자급능력 높이기에 고심하던 정부는
● 1973년 1월 - 서울시장에 의해 표준식단 제시
● 1974년 12월 - 돌솥밥 판매금지와 함께 스탠 밥공기에만 밥을 팔도록 행정명령 발동
● 1976년 6월 - 서울시장에 의해 고정 규격 발표, 1회 위반 시 1개월 영업정지, 2회 위반 시 허가취소 행정조치 발동
▷지름 10.5Cm * 높이 7.5Cm의 스탠그릇◁
● 1981년 - 보건사회부장관의 훈령으로 전국 사용 의무화되며 밥을 취급하는 모든 식당에서
통일된 양과 그릇을 사용하여 현재까지 변함없이 사용 중
3. 과연 일률화 효과가 있었을까?
● 신뢰 - 식당에 따라 들쭉날쭉 하지 않게 되었기에 다툼, 시기, 과다경쟁등의 분란 등이 사라졌습니다.
● 쉬운 원가 책정 - 공깃밥의 양이 통일되면서 한 그릇 소비량을 정확히 예측, 관리할 수 있게 되어 원가 책정이 쉬워졌습니다.
● 위생과 속도 - 한 번에 여러 개를 미리 담고 뚜껑을 닫아 놓아, 밥이 식거나 마름 없이 보관하면서 외부혼입 가능성이 줄고, 주문 시 바로 제공이 가능해져 서비스 속도도 빨라졌습니다.

4. 여담
● 1940년대 일본이 태평양 전쟁에 쓸 무기를 만들기 위해 놋그릇을 강탈해 가자
이를 막기 위해 제기와 식기등을 땅에 묻어 강탈당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 하지만 1960년대 중반 스테인리스 밥그릇이 나오자 대다수가 놋그릇을 버렸습니다.
● 스탠그릇은 영국 발명가 '해리 프리얼리'가 1920년대에 상용 제품으로 출시하였습니다.
● 1000원이던 밥 한 공기가 1990년대 초에는 500원 하던 시절도 있었으나, 물가 상승으로 2~3000원 하는 집도 생겨났습니다.
● 공깃밥을 담는 꼼수, 주걱으로 표면을 얇게 퍼 올려 가볍게 담아 공기층이 생기게 하는 방법으로 양이 같아 보이는 꼼수를 부리는 가게가 가끔 있습니다 - 아예 대놓고 적게 담는 가게도 있습니다.
● 스탠그릇 자체가 애초에 조금 작게 나오거나 내부 볼륨 그릇을 사용하여 겉보기와 다르게 조금 담는 곳도 있습니다.
● 국밥 등을 먹을 때 함께 나오는 밥공기를 세게 흔들어 뭉치게 한 후에 열면, 깔끔하게 떨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 625 전쟁 이전의 한국인은 겸상이 아닌, 각상을 하였습니다.